그러자 여호와의 말씀이 디셉사람 엘리야에게 내려왔습니다. “아합이 내앞에서 겸손해진 것을 보았느냐? 그가 내앞에서 겸손해 졌으니 내가 그의 시대에는 재앙을 내리지 않고 그 아들의 시대가 되면 그 집안에 재앙을 내릴 것이다.” (왕상21:28,29)
주일 저녁 두 딸과 QT를 하는데 이 구절에서 궁금증이 생겨 월요일 출근 길에도 이 구절을 계속 묵상하게 되었다.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지 못한 분한 마음에 음식도 안먹고 누워있는 아합왕을 보고 이세벨은 거짓 증인을 세워 나봇을 죽인 후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게 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보내 그의 집에 재앙을 내리고 그와 이세벨의 처참한 최후를 알려주셨다. 그러자 아합은 옷을 찟고 금식을 했고, 굵은 베위에 누워 반성의 모습을 보인다.
아합이 온전한 회개를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그의 나중 모습을 성서에서 보면 알 수 있다. 그런데 왜 그는 재앙을 면해 주시면서 그의 아들의 시대에 재앙을 주신다는 것인가? 하나님의 연좌제일까?
아침 출근길에 라디오의 설교 말씀을 통해 그 답을 얻었다. 그 설교의 내용은 현재 우리가 가진 많은 습관과 생각,행동이 부모,혹은 조부모로 부터 온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분노 장애,알콜 중독, 폭력적 언행이 부모에게 배운 것이라는 것이며, 그것을 내가 돌이키지 않으면 우리의 자녀도 지금의 내 악습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사람은 늘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받는다. 친구로 부터 혹은 선생님의 가르침으로부터, 하지만 부지불식중 우리가 취하게되는 많은 것은 부모님과 가정으로 오게 된다.
만약에 아합의 아들이 훗날 하나님께 돌아와 회개를 하였으면 그도 하나님의 재앙을 면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보고 배운 것은 악명 높은 아합왕의 우상 숭배와 불순종뿐이 아니었을까? 이것이 대를 이어가는 축복과 재앙의 이유가 아닌가 싶다. 어릴적 내 맘에 안들었던 부모님의 모습이 어느 순간 내 모습에서 나타나는 것이 우연한 사건은 아니다.
설교의 마지막에 놀라운 통계를 예화로 들려주셨다. 폭력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란 딸이 그런 남자를 배후자로 만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나의 자녀에게 재대로 된 배후자의 모델을 보여주지 못하면 자녀들은 가장 많이 보고 익숙한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나의 자녀가 좋은 배후자를 만나길 기도하기보다 내가 먼저 좋은 남편이 되어야 한다. 내 자녀가 좋은 배후자를 만나기위해 기도하지만 내자녀가 먼저 좋은 배후자가 되도록 준비 시켜야 한다.
결국 내가 먼저 축복의 시작이 되어야 하며 내가 하는 바에 따라 축복과 재앙은 시작 된다. 내가 어떤 씨앗을 뿌리는 가에 따라 자녀들이 수확하는 열매의 모습이 다른 것. 우리는 말과 행동을 서로 돌아보아 어긋남이 없어야 한다. 특히 자녀들이 보고 있는 가정에서는.. 가정은 가장 편한 쉼터이지만 자녀들이 삶을 배우는 교실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