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도 보내 드렸다.

2019년 2월23일 토요일 저녁 식사후 연락을 받았다. 아버지가 위독 하시다고 동생이 전화를 해 왔다. 바로 서울행 비행기 티켓을 구하려 웹 사이트를 뒤지고 있는데 카톡이 왔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한국 시간으로 2월24일 오후 2시 아버지는 천국으로 가셨다.

한국으로 가는 비행 시간은 11시간 30분으로 1시간 연착으로 더 지루하고 피곤하였다. 여러가지 생각으로 잠도 못 이루고 좌석도 중간 자리이기에 화장실도 제대로 가지 못했다. 모두 잠든 어두운 비행기안에서 CCM을 듣다가 혼자 흐느꼈다. 부지런히 도착한 장례식장, 입관의식도 나를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봉천교회 친구들, 음반업계 선후배, Soul 중창단 선후배등 예상보다 많은 문상객들이 위로를 전해 주었다.

진보가 장례식을 위해 일본에서 와 주어 같이 빈소를 지켜주었고 다음날 새벽에 도착한 벽제 승화원에서 화장을 진행하고 오후에는 금촌 아버지 외할머니 묘소에 같이 모셨다. 한국에서의 시간은 정말 꿈을 꾼 듯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2012년 어머니의 암수술로 인한 한국 방문 이후, 어머니 뇌경색, 어머니 소천 그리고 아버지 소천 까지 나의 한국 방문은 병원과 요양원 그리고 장례식장을 찾는 것이 주요 일정이었다. 이제 아버지도 떠나시니 시간을 내어 내가 자란 봉천교회와 우리가 제과점을 했던 자리를 찾아 보았다. 23년 만에 봉천교회에서 예배를 드렸고 기억속의 크기보다 작은 제과점 자리는 비어 있었다.

지난 번 어머니 장례식 부터 찾고 싶었던 사진이 있었다. 내가 초등학교(국민학교) 5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우리 제과점 앞을 지나 가시면서 찍어 주신 사진. ‘정선당 제과’ 간판 그리고 그 가게 앞을 쓸고 계신 어머니…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고 찾아 보았지만 찾지 못했다. 그래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그려 보았다. 그 사진을 그리고 제과점 내부의 풍경을…

누군가 그런 말을 한 것 같다. 우리가 자녀를 낳는 것은 삶을 계속하고 싶은 욕구 때문이라고… 인간은 죽으면 잊혀지지만 자녀들은 부모를 기억하기에 이 세상에 없지만 기억으로 존재하게 된다. 기억해 주는 사람이 있다면 잊혀지는 슬픔과 두려움은 사라질 것이다. 내가 우리 부모님을 기억하는 것도 내 기억 속에서 만이라도 살아계셨으면 하는 마음 때문이다. 가족은 같이 살면서 추억과 기억을 공유하며 쌓아 간다.

어느 오래된 이민자는 고향,부모 생각이 날 때 공항에 가서 비행기가 뜨는 모습을 보고 울다오고는 했다고 한다. 나는 어머니,아버지가 생각날 때 Daum 사이트에서 로드뷰로 부모님 사시는 아파트를 오랫동안 바라보곤 했다.

지난 어머니 병환으로 방문 했을 때, 아버지가 공항으로 배웅을 나오셨고 같이 버거킹에서 와퍼를 드셨었다. 이번에는 동생과 버커킹에서 같은 메뉴를 먹으며 아버지 이야기를 했다. 햄버거와 빵을 좋아하신 아버지. 어머니와 음식 취향이 참 다르셨다.

2012년 어머니가 유방암으로 수술을 받으신 때 부터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난 달 까지 7년을 나는 마음을 졸이며 살았다. 이제 부모님의 병환과 건강 문제로 근심하고 염려 하진 않을 것이다. 두 분 모두 고통없는 천국에 계실 것을 믿는다. 이제 내가 무엇을 기도하며 어떻게 살아갈지 고민해 본다.